모터사이클 유라시아 횡단기, 만남이 주는 기쁨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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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백미러에 비친 건 수랭 R1200GS입니다. 러시아에선 흔치않은 기종이라 ‘설마?’ 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니 라이더가 막 팔을 휘두르며 온 몸으로 자신을 어필합니다. 다크호스 S씨가 원정팀을 드디어 따라 붙은 겁니다.



며칠간 따로 떨어졌다가 원정팀과 재회한 S씨가 기쁨을 만끽합니다.

그는 6월 22일(월)에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떠난 뒤 카자흐스탄을 거쳐 3일하고도 한나절 만에 본대를 따라잡은 겁니다. 2박을 하는 것으로 예정된 모스크바에서 합류할 것이라 여겼는데 예상보다 하루 먼저 나타난 셈입니다. 그러니 S씨는 10년 만에 귀가한 탕아(?)라도 되는냥 반갑고도 격한 환영을 받습니다. 거기에는 평소에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 있습니다. 본대든 추격대든 서로가 힘든 여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홀로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달려온 터라 할 말도 많습니다.

S씨가 홀로 본대를 뒤쫓으면서 겪은 일들을 막 쏟아냅니다. “내가 말야~ 옴스크에서 첼… 그래 첼랴랴빈스크를 최대한 빠른 길로 달리는데 갑자기 국경이 나오는 거야~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에서 1박 했는데 거기서 만난 애가 현금뭉치를 보여주면서 어디서 놀고 싶으냐고, 어디든 말만 하라 그러고~ 직선 길에서 막 속도를 내는데 앞에서 차가 갑자가 좌회전 하는데 받아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힘든 여정이었던 만큼 할 말이 산처럼 많습니다.



경로를 빼곡하게 적은 종이 쪼가리에 의지해서 길을 찾았다고 합니다.

길 찾기는 어떻게 했을까요? 광활한 시베리아 대평원과 중앙아시아의 주요 도시와 경로를 빼곡히 적은 종이를 보여줍니다. 러시아 글씨가 쓰기 어려워서 그림이려니 하고 그렸다고 합니다. 이로써 8인이 다시 모였고 24일(수)에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떠난 H단장 1인만 아직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S씨보다 출발이 2일 더 늦었으니 모스크바에서 합류할 수 있을지 장담이 안 됩니다. 본대가 속도조절을 하고 있긴 하지만 멈출 수가 없는 상황인 데다 크라스노야르스크와 모스크바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만도 4천km가 넘습니다. 이러다 독일에서나 만나는 건 아닌지 했건만… 그건 H단장의 저력을 얕봤다는 걸 곧 알게 됩니다.



그 시각, H단장도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떠나 원정팀을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S씨가 원정팀에 합류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지금, H단장 역시 본대를 뒤쫓아서 열심히 달리고 있을 겁니다. 원정팀 8인 대열이 모스크바로 향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모스크바까지 가는 건 무리입니다. 모스크바를 200여km 남겨두고 블라디미르에서 숙박하기로 합니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P본부장이 숙소를 물색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숙박할 곳과 숙소를 미리 정해두긴 어렵습니다. 긴 일정이어서 도중에 변수가 많으니 그렇습니다. 며칠 뒤에는 어디쯤 가겠지 예상했더라도 실제로 딱 맞아떨어지진 않으니 숙소는 하루 전이나 당일 오전에 물색해 두고 현지에 도착해서 체크인하는 식입니다.



블라디미르에 가까워질 무렵,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블라디미르에 들어서자마자 위치한 호텔을 미리 물색해 뒀지만 막상 와 보니 만실이라고 하네요. 하는 수없이 다른 숙소를 찾느라 빗속을 헤매는데 Z씨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한마디 합니다. “낮에 왜 자기한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고 갔느냐?”며 항의합니다. 처음엔 무슨 얘긴가 싶었다가 니즈니 노브고로드를 지날 무렵 회전교차로에서 있었던 일이란 걸 깨닫습니다. 회전교차로 구간에 빗물이 고인 걸 본 Z씨가 멈췄고 뒤따르던 저는 그대로 밟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덩달아 멈추면 뒤편 일행들이 다 멈춰야 하고 대형 트럭과 차량들이 줄줄이 따라오는 상황이라서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 빗물이 Z씨에게 튀었던 모양입니다.



블라디미르에서 급히 물색한 숙소는 상당히 격식 있고 좋은 호텔입니다.

“교통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중요하다. 거기서 멈추면 위험하다.”고 설명했건만 Z씨는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입니다. 제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건만 그에겐 그렇지 않았던가 봅니다. 새롭게 찾은 숙소는 상당히 품격을 갖춘 좋은 호텔입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레스토랑이 문을 닫은 터라 친절한 직원으로부터 확보한 빵과 각자 보유한 비상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합니다. 어느덧 한국을 떠나온 지 20일째입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막막한 느낌이 있었고 실제로 러시아를 달리면서 이렇게 광활하다니…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달려도 달려도 계속 이어지는 지평선에 질리기도 했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지평선의 끝자락에 겨우 다다른 느낌이 들자 잠이 오지 않습니다.



블라디미르의 제정러시아 시대 유적들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19일차, 모스크바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직선도로를 달려서 2백km입니다. 도중에 휘어지는 지점 하나 없이 직선으로만 2백km.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길이지만 여기서는 그러려니 여기며 달립니다. 갑자기 차량이 양방향 모두 엄청나게 늘어나 심한 정체를 보이나 했더니 드디어 모스크바에 들어섰습니다. 마치 서울 시내와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10차로쯤 되는 대로에 가득한 차량들 뒤에서 가다서다 하고 있자니 러시아 운전자가 창을 열고 소리칩니다. “왜 안 가고 그러냐? 차 사이로 가면 된다!” 그래도 괜찮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건 또 웬 일인지… 저 멀리 극동의 한반도를 떠나서 대륙 건너편 모스크바까지 왔다는 기분을 천천히 즐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모스크바의 숙소는 크렘린 궁에서 가까운 쯔베르스카야 거리의 푸시킨 호텔입니다.

러시아에는 옛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가 여럿 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린부르크, 블라디미르 등… 하지만 가장 긴 세월동안 수도 기능을 맡은 모스크바는 모스크바 강에서 딴 이름입니다. 모스크바의 역사는 1147년 유리 돌고루키 왕자 치세부터 전면에 등장합니다. 19세기 표트르 대제 시기에 수도를 상트페테르브루크에 옮겼으나 1918년에 다시 모스크바로 이전합니다. 그리고 소비에트연방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서냉전 시기에는 지구를 벌벌 떨게 만든 극한대결의 한 축으로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모스크바 번화가의 한국식당 ‘김치’에서 오랜만에 맛보는 김치만두전골입니다.

먼저, BMW모토라드를 찾아가 엔진오일 교환을 비롯한 정비를 위해 모터사이클을 입고합니다. 이르쿠츠크에서 엔진오일을 교환한 뒤 또 5천km를 달렸으니까요. 블라디보스톡부터 모스크바까지 9천km를 달렸으므로 타이어도 살펴봅니다. 그런데 뜻 밖에 타이어는 대부분 멀쩡하고 교체를 필요로 하는 건 단 2대뿐입니다. P본부장은 H단장을 탠덤한 채 많은 거리를 달렸기에 마모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고 J여사의 C600스포츠 스쿠터는 예비 타이어를 가져온 터라 교체하기로 합니다. 대체로 급가속이나 감속이 필요 없는 도로 여건상 타이어 소모가 느린 것으로 보입니다. 쯔베르스카야 거리의 푸시킨 호텔에 여장을 푼 뒤 가까운 한식당 ‘김치’에서 저녁식사를 합니다.



밤 10시 무렵… 말로만 듣던 백야를 경험합니다.

모스크바의 밤은 10시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해서 새벽 3~4시쯤이면 창밖이 밝아옵니다. 말로만 듣던 백야입니다. 그런데 자정이 막 넘어설 무렵, 단잠을 깨우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4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김종한 admin@bikerslab.com
제공  바이커즈랩(www.bikersla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