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 유라시아 횡단기, #15 진짜 유럽으로

0
122

22일차 헬싱키

시베리아를 지나 러시아를 횡단하는 동안 느낀 점이 여럿 있습니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땅 부자 나라인 만큼 끝없는 지평선에서 맛보는 거대한 대륙의 면모나, 도중에 만난 여러 인종들의 조합에서 받은 각별한 인상 등 외부적인 요소도 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는 측면도 많았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곧은길을 달리노라면 참으로 많은 잡상이 머릿속을 떠돌기도 하고 그동안 삶을 돌아보는 성찰도 이뤄집니다.



여전히 탈 없이 잘 달려주는 R1100GS가 대견합니다

흔히 말하는 내면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 같은 거겠지요. 거기에 또 하나 덧붙인다면 바로 모터사이클과 나또는 나와 모터사이클이라는 조금 현실적인 주제도 있습니다. 모터사이클을 탄 지 어언 3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이 번 유라시아횡단이 어쩌면 새로운 장으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리라는 강한 예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뭔지 딱 부러지게 말하긴 어렵지만, 지금이 모터사이클 라이프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순간이 아닐까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습니다. 옛날에 비슷한 전환기(?)를 경험한 적이 있었으니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할 수 있는데굳이 나누자면 제 모터사이클 라이프가 23장 째에 접어든 느낌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벗어나기 전 성모승천 성당을 배경으로 추억남기기

오늘 상트페테르부르그를 떠나 핀란드 국경을 넘어가면 기나긴 러시아 일정을 마무리 짓게 됩니다. 러시아 땅에서 달린 거리만 1km. 전체 일정의 2/3에 이릅니다. 나머지 1/3은 어쩐지 진짜 유럽을 달리는구나 싶은 기분이 듭니다. 며칠 전 넘은 우랄산맥이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경계건만 러시아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왠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벗어나기 전 성모승천 성당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핀란드를 향해 달립니다.



기나긴 러시아 여정을 뒤로 하고 핀란드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러시아와 핀란드 국경을 눈앞에 두고 주유소에 들러서 휘발유를 기름통 가득 눌러서 채웁니다. 국경을 넘는 순간 휘발유 가격이 2.5배로 뛰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휘발유 가격을 자랑하는 곳이 북유럽입니다. 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맛나게 먹습니다. 그런데 주유와 휴식을 마치고 출발하려는 순간, H단장의 모터사이클이 또 문제를 일으킵니다. 시동이 안 걸리네요. 2013년에 출시된 수랭엔진 GS는 핸들뭉치가 문제가 있어 리콜을 단행한 바 있습니다. 당시 H단장은 왼편 핸들뭉치만 교체하고 오른편 스로틀의 핸들뭉지는 문제없다고 여겨 교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던 것이 하필이면 지금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다니, 공교롭기가 시집가는 날 등창에 버금갑니다.



H단장의 모터사이클이 또 고장을 일으켰으나 모기약 응급처방해서 고칩니다

H단장의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이미 큰 고장으로 지옥의 강행군을 한 터라 여기서 다시 멈춰버리면 어쩌나 싶은 기색이 역력합니다. 일단 스로틀 쪽 핸들뭉치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커버를 벗겨서 먼지도 후후~ 불어낸 뒤 재시동에 나서지만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등장한 분무기형 모기약을 분사해서 핸들뭉치 속 먼지를 씻어내니 시동이 걸리네요. 시동불량에는 모기약!!! H단장의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어쨌든 모기약 덕분에 시동을 걸고 러시아·핀란드 국경을 넘습니다. 대략 1km를 달려서 드디어 러시아를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러시아를 벗어나 핀란드에 들어서는 과정이 순조롭습니다

러시아 측 출입국 관리소와 세관을 거쳐서 이번에는 핀란드 측을 통과하는데, 그린카드를 만들라고 하네요. 그린카드는 EU연합을 달릴 때 필요한 책임보험 같은 겁니다. 모터사이클 1대당 300유로비쌉니다. 발트3국을 경유한 낭만 팀은 라트비아에서 30유로에 만들었다니 가격 차이가 엄청납니다. 북유럽의 고물가란! 그래도 그린카드는 당연히 있어야 하고 여러 모로 보장되는 혜택이 많습니다. 만일의 사고에 라이더가 위급상황이라면 구급헬기가 날아와 싣고 병원으로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2년 전 알프스투어 때 함께 달리던 분이 사고가 있어서 실제로 목격한 바 있습니다.



S할배가 발트 해의 보석으로 불리는 실자라인(심포니)에 오릅니다.

핀란드는 청정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헬싱키를 향해 달리는 동안 시원한 공기와 깨끗한 숲이 이어집니다. 도로는 또 어찌나 깔끔한지, 그동안 달려왔던 도로에 비하면 노면이 비단결이나 다름없습니다. 헬싱키에 도착해서는 곧장 페리터미널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이 실자라인이 문을 열어놓고 우리 일행을 맞이합니다. 겨우 10분 뒤면 승선이 완료된다니 곧장 승선표를 사서 배에 오릅니다. 매표창구가 톨게이트 방식이라 티켓팅과 승선이 일사불란하니 어라?’ 하는 사이에 배 안이고 숨 좀 돌리니 방 안에 들어와 있네요.



초대형 페리의 쇼핑가에서 어릿광대들이 승객들에게 쇼를 선보입니다

2층 침대가 두 개인 4(C클라스) 선실에 모터사이클 선적까지 1인당 10만원 안팎이니 무척 쌉니다. 물가가 높은 북유럽이지만 승선운임이 뜻 밖에 저렴해서 놀랍습니다. 북유럽이 해운강국이라더니, 바다 쪽 인프라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자라인은 발트해의 보석으로 불리고, 핀란드 헬싱키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잇는 초대형 페리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호화 유람선을 타 보진 않았지만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싶네요. 선내 시설이나 규모가 상상을 넘어섭니다. 12층 엘리베이터가 여러 개 움직이고 수영장이 있는가 하면 면세가 적용되는 쇼핑가에 고급 식당과 라이브 바 등이 배 안에 즐비합니다. 웬만한 마을 하나가 통 채로 들어와 있는 거 같습니다.



발트 해의 밤은 백야로 인해 푸르게 빛납니다

실자라인은 발트 해 연안의 헬싱키·스톡홀름·탈린·리가 등, 여러 도시를 오가는 페리 선사입니다. 헬싱키와 스톡홀름을 잇는 노선은 심포니와 세레나데 2대가 교차 운항합니다. 오후에 헬싱키를 출항해서 밤새 발트 해를 건너 스톡홀름까지 4백여km를 운항해서 아침에 도착합니다. 투어 팀 입장에서는 모처럼 여유있는 휴식을 즐기면서 이동까지 하는 셈이니 일석이조입니다. 라이브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저녁시간을 보낸 뒤 2층 침대에 누웠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습니다. 선실 밖으로 잠시 바닷바람을 맞으러 나서봅니다.



스톡홀름으로 접근하는 좁은 수로. 식당 창 밖에 육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23일차 스톡홀름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건만 백야로 인해 밤바다가 그리 어둡게만 보이진 않습니다. 푸른 하늘빛과 짙푸른 바다빛이 만나는 수평선도 확연히 분간이 됩니다. 꽤 늦은 시간까지 떠들썩하던 마을(?)에도 인적이 없고 초록 조명이 고요할 뿐입니다. 괜히 청승인 거 같아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가 싶은데 어느새 아침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발트 해에서 바라보는 일출사진을 한 장쯤 남기고 싶었지만 틀렸네요. 늦게 일어나기도 했지만 하늘이 좀 흐립니다. 큰 바다에서 스톡홀름에 접어드는 좁다란 수로가 이색적입니다. 좁은 수로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이지만 일부러 만든 운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크고 작은 섬들 사이로 이어지는 수로가 좁은 곳은 200미터가 될까 말까 싶어서 이런 초대형 페리가 지나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모터사이클에 올라 힘차게 달려서 스웨덴(스톡홀름)에 상륙합니다.

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스톡홀름까지 거리는 9백여km 정도 됩니다. 그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간밤에 공짜로 이동한 셈입니다. 배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하선한 뒤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향해 남하하는데, H단장의 모터사이클이 또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16편으로 이어집니다)

글/사진  
김종한 (만화가 & 여행작가)
제공
바이커즈랩 (www.bikersla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