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차 엔젤홈
원래 계획은 헬싱보리까지 내려가 페리를 또 한 번 타고 15분이면 건너는 덴마크 코펜하겐까지 일사천리로 달릴 생각이었으나, H단장의 모터사이클이 또 문제를 일으켜서 계획이 틀어지게 됐습니다. 어제 러시아에서 한 것처럼 응급처치를 해 보지만 안 되네요. 조금 심각해집니다. 모터사이클을 트럭에 싣고 BMW딜러가 있는 스톡홀름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그림이 영 별로입니다.
그래서 휴게소 주차장 구석에서 ‘야매’수리를 시작합니다. P본부장이 가져온 공구를 모조리 꺼내놓고 핸들 뭉치를 뜯습니다. 최신형 수랭 R1200GS는 전자식 스로틀입니다. 기존의 케이블 방식에 비해 조작감이 가볍고 즉각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스로틀 뭉치의 커버를 벗겨내니 온오프 스위치 센서와 기판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알맹이를 노출한 채 청테이프를 다듬어서 지붕처럼 씌워줍니다. 혹시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시동은 어떻게? 렌치로 드러나 있는 센서의 접점을 건드려서 겁니다. 이렇게 응급처방으로 시동을 걸 수가 있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제 H단장이 재킷 주머니에 렌치를 넣어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시동을 거는데,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재밌습니다. 나중에는 스스로도 재미가 들렸는지 익숙하게 잘 합니다. 이렇게나마 처치해서 달릴 수 있는 게 어디냐며 환하게 웃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함께 지켜본 네덜란드 부부라이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시동 문제로 고심할 때 뭐든 도우려고 무척 애 쓰는 모습이 고맙고 감명적이었습니다.
모터사이클 시동 문제를 임시처방으로 해결한 뒤 계속해서 남하합니다. 노르셰핑 부근 길가 쉼터에서 점심식사를 만들어 먹습니다. 휴게소 옆 숲에 탁자와 벤치가 마련돼 있고 주차공간도 있는데, 야영장은 아닌 거 같고 뭐라 불러야 할지… 지나다가 간단하게 소풍을 즐길 수 있는 공간? 우리 일행 말고도 여러 자동차 운전자들이 들어와 쉬어가곤 합니다. 나이 지긋한 노부부나 트럭 운전수도 있는데, 누런색 장삼을 걸친 승려와 어린 아이는 정체가 뭔지 아리송합니다. 하여튼 팩 포장된 영양식에 더해 마른 누룽지를 끓여서 멸치볶음과 함께 점심 한 끼를 해결 합니다. 모두 S할배의 짐 가방에서 나온 것들인데, 이번에 해치워서 무게를 확 덜어드렸습니다.
북유럽에 들어선 뒤부터는 한결 여유가 있습니다. 러시아 구간이 통과했다는 느낌이라면 핀란드와 스웨덴을 지나는 건 유유자적 그 자체입니다. 식사 뒤 풀밭에 드러누워 단잠을 즐기다가 다시 길에 복귀합니다. 얼핏 바다인가 착각하게 만든 베테른 호수를 지나 헬싱보리를 향하다가 슬쩍 옆으로 빠져 보리밭 사이를 한참 달리니 ‘엔젤홈’에 들어섭니다. 유럽에서 장소(도시)를 이르는 말이 다양합니다. 부르크·부르그·베르크·버그 등… 그것이 스웨덴 말로는 ‘보리’인가 봅니다. 물론 보리밭의 보리와는 다릅니다. 엔젤홈은 우리나라 읍면 단위보다 조그만 소도시입니다. 여기서 숙소를 찾아서 묵어갈 겁니다. 오전에 시동 시위치 수리를 하느라 지체가 있어서 덴마크까지 가는 건 포기합니다.
북구의 작은 도시는 늦은 저녁임에도 밝고 활기가 있습니다. 숙소(콘티넨탈 호텔) 부근 카페에서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로 저녁식사를 한 뒤 뜨거운 커피를 마십니다. 카페 테이블의 의자마다 걸려있는 담요가 의아했으나 해가 넘어가니 금세 기온이 떨어져서 싸늘합니다. 담요를 걸치고 보니 시베리아를 지나면서 만났던 무더위가 어느새 기억 저편에 희미합니다. 호텔 카운터를 지키는 주인장은 70대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동안에 쾌활한 성격입니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손짓하며 젊은 시절에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찍은 것들이라며 자랑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모터사이클로 세계를 달릴 생각은 못했다며 우릴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습니다.
25일차 베를린
어제 대도시 헬싱보리를 눈앞에 두고 소도시 엔젤홈에서 묵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비록 조그만 도시지만 BMW모토라드 딜러가 있기 때문입니다. H단장의 R1200GS는 2013년식으로 공랭에서 수랭엔진으로 변경된 첫 해에 해당합니다. 해당 년도 기종들이 핸들 스위치박스 문제로 리콜이 있었지만 교체하지 않고 넘어갔던 탓에 그저께, 어제, 두 번이나 시동이 안 걸리고 멈추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H단장의 모터사이클을 살펴보던 딜러의 정비사가 연식과 모델 번호를 적어갑니다. 그리고 컴퓨터로 뭔가 조회하더니 스위치박스 무료 교체 대상이라고 하네요. 따로 수리비 없이 스로틀 쪽 스위치박스를 즉석에서 교체합니다.
비록 고장을 일으키긴 했지만 BMW모토라드의 글로벌 서비스는 큰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십여 년 전, 홀로 R1200R을 타고 일본을 일주할 때 1만km 정비점검 서비스를 시코쿠에서 받은 기억도 납니다. 하여튼 이제 H단장의 모터사이클은 모든 문제를 털어낸 셈입니다. H단장이 환한 미소를 보여줍니다. 이번 유라시아 횡단 도중 모터사이클 트러블로 인해서 맘고생 몸고생이 컸으니까요. 이제 모터사이클 문제로 고생할 일은 없어진 셈이니까요. 딜러의 직원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서 온 한국인을 처음 봤다고 하네요. 그렇겠죠. 근처에 헬싱보리라는 큰 도시도 있고 일부러 작은 동네 엔젤홈을 찾을 한국 라이더가 나중에 또 있을까 싶습니다.
H단장의 모터사이클을 수리한 뒤 가벼운 마음으로 근처 바닷가를 찾습니다. 스웨덴과 덴마크를 가르는 카테가트 해협의 해변입니다. 길다랗게 이어진 모래밭과 사구가 마치 충남 태안의 신두리 사구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 좁은 바다를 끼고 스웨덴 쪽 발트해와 덴마크 쪽 북해가 나뉩니다. 북해는 곧 대서양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S할배가 모래밭을 거닐며 먼 바다를 바라봅니다. 머나먼 길을 달려와 대륙의 반대편 바닷가에 선 감회가 남다른 듯합니다. 만일 내가 S할배처럼 76세가 됐을 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생각하니 왠지 아련한 기분이 듭니다.
스웨덴과 덴마크를 나누는 카테가트 해협이 헬싱보리와 헬싱괴르 사이에 와서는 더욱 좁아져서 외레순 해협이 됩니다. 이 좁디좁은 바다는 페리를 타고 15분이면 건넙니다. 해협을 건너는 것이 곧 국경을 넘는 것이지만, 과정은 아주 간단합니다. 페리 승하선이 톨게이트 방식으로 간단하게 이뤄집니다. 덴마크를 건넌 뒤에는 곧장 코펜하겐 외곽도로를 달려서 최남단 겟사 항으로 향합니다. 도중에 들른 미들레더센트렛(중세민속촌)이 인상적입니다. 중세시대 생활상을 재현한 곳에 주민들이 실제로 거주합니다. 점심식사로 주문한 요리가 기사상차림·성주상차림 하는 식입니다. 나무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칼 두 자루를 이용합니다. 중세시대는 아직 포크를 쓰지 않았던 걸까요?
중세민속촌에서 대포발사 재현까지 구경한 뒤 겟사 항에서 또 한 번 페리를 탑니다. 2시간 항해 뒤 독일의 로스토크 항에 도착해서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아우토반을 달리기 시작합니다.
(17편으로 이어집니다)
글/사진
김종한 (만화가 & 여행작가)
제공
바이커즈랩(www.bikersla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