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풍미한 카페레이서, 노튼 브랜드 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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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라면 한번쯤 봤을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이 영화는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젊은 시절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미대륙을 여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 내내 체 게바라가 탄 포데로사라는 모터사이클에 자연스레 눈이 간다. 연료 탱크 옆에 새겨진 노튼(Norton)이라는 브랜드명. 도대체 노튼은 어떤 브랜드이길래 걸출한 인물인 체 게바라가 여행 동반자로 선택한 것일까?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여행 당시 사진


전설의 시작

노튼은 1898년 제임스 노튼에 의해 영국에서 설립된 모터사이클 제조사이다. 설립 당시 엔진에 대한 기술력이 부족했던 노튼은, 프랑스의 푸조 등으로부터 엔진을 공급받아 1902년부터 모터사이클 개발 및 생산에 착수 했다. 1907년 노튼은 부족했던 기술력을 극복하고, 드디어 새로운 모터사이클을 생산했다. 노튼은 ‘O-2763’이라 불리던 이 모터사이클로 제 1회 맨섬TT 레이스 2기통 부문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노튼의 첫 맨섬 TT 레이스를 우승으로 이끈 레이서 렘 파울러

맨섬TT의 우승 후 대중에게 노튼의 이미지를 각인한 노튼은 인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이 같은 인기를 기반으로 1908년 최초로 양산형 기종인 빅 포 – Big Four(Model 1)’을 선보였다. 당시 영국에서 모터사이클은 백화점에서 판매되곤 했었는데, 노튼의 모터사이클은 런던의 헤롯 백화점에서 판매됐다.  

꾸준히 모터사이클 개발을 하며 대중과 소통해 온 노튼의 수장 제임스 노튼은 1925년 향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제임스 노튼이 사망한 이후에도, 뛰어난 성능의 모터사이클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던 노튼의 개발자들은 끊임없이 레이스 머신을 생산했다. 연이은 레이스에서의 우수한 성적은 노튼 모터사이클이 성장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매년 4000대의 모터사이클을 생산 해 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때부터 현재까지도 노튼은 100% 수작업 공정을 고집하기에 연간 생산량에 한계가 있다)


독보적인 페더베드 프레임

노튼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은 페더베드 프레임의 개발이다. 노튼이 1949 2기통 엔진의 도미네이터를 생산할 당시, 카페레이서 모터사이클에 열광하던 당시 영국의 젊은이들이 갈망하던 것은 더 빠른 스피드와 날카롭고도 안정적인 핸들링 성능이었다. 이미 맨섬TT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우수한 성적을 거두던 노튼은, 페더베드 프레임의 개발을 통해 소비자들의 니즈를 한층 더 충족시켰다.

더 가벼워진 중량, 그러면서도 더욱 강력한 강성을 가진 페더베드 프레임은 레이스 성적과도 직결되는 요소였다. 이 페더베드를 통해 노튼은 영국 내의 경쟁 브랜드(트라이엄프, BSA)에 비해서 가장 작은 규모였음에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1951년부터 양산형 모터사이클에 적용하기 시작한 페더베드 프레임은, 현재까지 회자되는 프레임이다.

이 페더베드 프레임을 바탕으로 노튼은 1947~1954년 맨섬TT에서 매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영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엔진은 트라이엄프, 프레임은 노튼이라는 암묵적인 공식이 널리 퍼졌었다. 두 요소를 직접 커스텀하여 혼합한 트리톤(Triton, 트라이엄프 + 노튼) 카페레이서라는 새로운 장르까지 유행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노튼의 인기를 단면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국 모터사이클 브랜드들의 위기

1960년대에는 미국이 새롭게 부상하는 모터사이클 시장이었다. 각 유럽의 모터사이클 브랜드들은 미국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노력을 했다. 때마침 노튼의 주력 기종인 코만도가 1967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코만도는 750cc로 본격적인 레이스 머신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코만도의 엔진은 더욱 부드러워졌고 진동은 적어졌다. 안정감 있는 주행감각이 매력이었던 코만도는 개발 후 10여 년 간 50만대 이상이 팔렸을 정도로 그 인기가 높았다. 또 코만도로 미국시장을 공략하던 노튼은 노튼 걸 캠페인이라는 새로운 시도도 했다. 당시 모터사이클 역사상 최초로 여성 광고모델이 등장했기에,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어느 시장이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판도가 서서히 바뀌기 마련이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 고성능, 가격적인 우위 등을 앞세워 공격적인 마케팅 경쟁을 펼치는 일본 브랜드들의 영향력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영국제 모터사이클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구시대적 유물로 취급 하기에 이르렀다.

시장에서 우위를 잃어가던 유럽 모터사이클들은 일본 브랜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경쟁력과 우수한 품질로 무장한 일본 브랜드의 공세를 노튼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결국 1969고성능 4기통 네이키드 모터사이클혼다의 CB750의 등장으로 영국제 모터사이클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노튼은 1973년 개발한 850cc 코만도로 시장에서 버텨보려 했지만 이마저 녹록하지 않았고 점차 재정이 악화되기에 이른다.



1969년 출시된 혼다의 CB750 Four

이미 BSA 1972년 재정악화로 인해 트라이엄프와 인수합병을 단행했다. 노튼도 일본 모터사이클들의 득세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상황이어서, 트라이엄프-BSA가 제안한 인수합병을 거절 할 수 없었다. 합병 당시 노튼의 CEO가 경영권을 맡았고 회사의 이름을 노튼 빌러스 트라이엄프(NVT)’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NVT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파죽지세로 뻗어나가는 일본 모터사이클을 상대하기엔 소비자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요소들이 부족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후화된 생산설비, 노사간의 갈등 등 여러 악재가 연이어 발생하고, 결국 NVT는 무너지고 말았다. 공중 분해된 노튼의 권리도 결국 미국으로 팔리게 됐다. 당시 영국 브랜드 중에서는 유일하게 트라이엄프만이 겨우 부활에 성공해 영국산 카페레이서의 명맥을 이어갔다.


다시 돌아온 전설

그렇게 세계 모터사이클 시장은 일본 브랜드 중심으로 재편되는 듯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고전적인 카페레이서 모터사이클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고, 첨단장비와 기술력으로 무장한 슈퍼스포츠 모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라이더들은 슈퍼스포츠 모터사이클에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라이더들은 서킷에서 질풍처럼 달리는 머신이 아닌, 일상에서 다루기 쉬운 모터사이클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0년대 초반 전세계적으로 복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의류,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던클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부각되었다. 모터사이클도 이러한 변화의 추세에 포함되었다. 그에 따라 도심에서 운행하기 편리하고,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인 기능을 가미한 레트로풍 모터사이클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일본 모터사이클 제조사들은 즉각 이러한 트랜드에 부응하는 클래식 모터사이클 제조에 열을 올렸다.



헐리우드 배우 키아누 리브스의 코만도850

하지만 이미 기존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모터사이클 브랜드를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라이더들은 자신들이 살아보지 않았던 시대에 대한 아이러니한 향수를 느끼기 시작했고, 낡은 이미지로 인식되던 모터사이클은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러운 모터사이클로 탈바꿈 했다. 자연스레 100년 가까운 긴 역사를 간직한 트라이엄프, 노튼 등의 영국제 모터사이클들이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