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데이비슨 스포스터, 격전의 시대에서 새천년까지

0
120

작은 고추가 맵다. 할리데이비슨의 스포스터 계열에 잘 어울리는 말이다. 지금의 스포스터 계열은 리터급에 버금가거나 혹은 오버리터급이기에 작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할리데이비슨의 빅트윈 크루저에 입문하기 위한 전 단계로 인식하기 쉬운 스포스터 시리즈는, 사실 할리데이비슨의 역사에서 중요하고 굵직한 계보를 갖고 있다. 때문에 단순히 간편한 할리데이비슨, 접근성이 쉬운 할리데이비슨으로 인식했다면 오산이다.
 
스포스터 시리즈의 역사는 무려 60년이 넘었다. 20세기 중반에 탄생해 21세기 할리데이비슨 다크커스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기까지 얌전히 걸어오지 않았다. 레이스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스포스터만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확립했고, 이제는 뉴스쿨 문화의 주축을 담당하며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모터사이클로 자리매김했다. 덩치 큰 사내들만 탈 것 같은 할리데이비슨의 이미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전통과 트렌드를 절충한 스포스터 시리즈가 이를 증명했다.


세계대전의 잔해, 산업을 바꾸다

세계대전 후의 잔해는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모터사이클 산업도 마찬가지다. 1950년대에 미국의 모터사이클 산업은 신진세력들로 붐볐다. 2차 대전 후 인디언이 몰락하면서 할리데이비슨은 미국을 대표하는 모터사이클 제조사가 됐지만, 당시 미국 내에는 해외 모터사이클 브랜드가 성장했다. 할리데이비슨은 일본과 유럽 브랜드의 저배기량 모터사이클 공세에 주춤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기종을 준비했다.
 
물론 이미 할리데이비슨도 저배기량 모터사이클을 염두에 뒀다. 1948년에 공개한 모델S는 독일의 자동차/모터사이클 브랜드인 DKW의 모터사이클을 기반으로 제작한 기종이며, 125cc 단기통 엔진을 탑재했다. 특유의 피넛탱크도 이때부터 적용했으며, 모델S 1966년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변형하며 출시했다.

그리고 1952, 보다 현대적이고 경쟁력 있는 기종인 모델K를 선보였다. 모델K는 지금의 스포스터 시리즈의 전신이라 볼 수 있다. 엔진은 750cc V트윈에 사이드밸브 방식을 사용했고, 4단 트랜스미션과 일체형으로 제작해 콤팩트한 크기를 완성했다. 또한 프론트에 텔레스코픽과 리어에 더블 쇽업소버를 채용했으며, 이는 할리데이비슨 최초로 유압식 서스펜션을 사용한 것이다. 시프트 페달은 오른쪽 발로 조작하도록 했는데, 이는 더트 트랙 레이스를 염두에 둔 설정이다.
 
이후 KK KL 등의 버전도 공개했다. 또한 압축비를 높이고 더 큰 카뷰레터를 장착하면서, 온로드 및 오프로드 레이스 규정에 맞게 세팅한 KR, KRTT, KRM 등으로 레이스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모델K는 기존의 할리데이비슨과는 다른 콘셉트로 스포티함을 강조해 외세에 대응한 기종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노튼과 트라이엄프 등의 모터사이클에 비해 여전히 부족했다. 시장 반응도 기대했던 만큼 얻지 못했다. 할리데이비슨은 엔진 성능을 더욱 개량했다. 기존의 750cc 배기량이었던 엔진을 883cc로 키운 KH KHK 등을 출시했다. 물론 KHR, KHRTT, KHRM 등으로 레이스에도 꾸준히 참가했다.


20세기를 장식한 스포스터 가문의 활약

K/KH 시리즈가 큰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할리데이비슨에게는 중요한 기종이다. 스포스터의 포문을 열기 위한 좋은 교보재였다. 대배기량의 크루저로만 입지를 굳히던 할리데이비슨이, 본격적으로 유럽 브랜드에 대항할 수 있는 스포츠 모터사이클의 포문을 터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7년에XL 스포스터가 등장했다. 스포스터는 아이언헤드 엔진을 탑재했으며, 사이드밸브 대신 OHV를 채용하고 배기량은 900cc급으로 키웠다. 기존의 K KH 시리즈에 비해 더욱 가볍고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브레이크 페달은 여전히 왼쪽, 시프트 페달은 오른쪽에 위치했다. 또한 휠베이스를 더욱 짧게 설계해 경쾌한 운동성능을 확보했고, 최고속도는 163km/h에 달했다. 스포스터는 이전의 KH보다 더욱 잘 팔렸다. 이후 XL의 다양한 가지치기 기종인 XLC, XLH, XLCH 등을 선보였고, 레이스 전용인 XLR, XLRTT 등도 기존의 KHR KHRTT의 뒤를 이었다.

XL 스포스터는 연식 변경에 따라 엔진성능을 향상시키면서 꾸준히 생산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포스터 시리즈는 상품성을 더욱 강화했고, 패니어케이스와 윈드쉴드 등을 부착해 편의성을 보강하기도 했다. 레이스에서도 이전의 KR 머신 등과 함께 스포스터의 계보를 이었다.

1970년에는 할리데이비슨의 역사적인 레이스 머신인 XR750이 등장했다. 당시 AMA의 레이스 규정에 따라 스포스터 기반으로 제작했다. 하지만 초기형은 엔진 결함과 출력 부족 등의 문제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어x스트로크 비율을 수정하고 실린더 헤드를 교체하는 등 퍼포먼스와 내구성을 향상시킨 신형 XR7502년 후에 선보였다. XR750 30년 가까이 더트 트랙 레이스에서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할리데이비슨에게 안겨준 머신이다. 온로드 레이스 머신인 XRTT도 당시에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XL시리즈의 가지치기도 지속됐다. 1977년에는 투어링 성능을 가미한 XLT와 카페레이서 스타일의 XLCR이 등장했다. XLCR은 프론트에 더블 디스크를 채용하고, 헤드라이트에는 로켓 카울을 덮는 등 본격적인 카페레이서를 지향했다. 판매량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기존의 할리데이비슨에서 선보이지 않았던 스타일의 기종이었기에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나 알려졌고 희소성을 인정받았다.

1983년에는 XR750에 영감을 받아 XR-1000을 공개했다. 최고출력은 70마력을 발휘했고, 머플러는XR750을 연상케 하듯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XR-1000은 도로 위의 XR750을 상징하며 높은 판매가격을 형성했다. 그리고 1984, 아이언헤드 엔진을 대체하는 에볼루션 엔진이 등장했다. 이후 1986년부터 에볼루션 엔진을 탑재한 스포스터 시리즈를 선보였다. 1987년에는 스포스터의 탄생 30주년을 맞이해 허거 스포스터(hugger sportster)를 공개했고, 1991년부터는 모든 스포스터에 5단 트랜스미션과 벨트 드라이브를 채용했다. 1996년에는 1200스포츠와 1200커스텀을 스포스터 라인업에 추가했다.


다크커스텀, 새천년을 밝힌 촛불

스포스터는 어느덧 한 세기를 넘어 새천년을 맞이했다. 2002년에는 883R을 선보였다. 883R 883cc 에볼루션 엔진을 탑재했고, 오렌지 컬러를 비롯해 XR750의 스타일을 가미해 기존의 ‘883’버전보다 스포티함을 강조했다. 2004년에 접어들면서 스포스터 라인업은 엔진과 프레임을 러버 마운트 방식으로 교체했고, 브레이크 시스템을 개선했다. 또한 1,200cc급의 스포스터 시리즈는 엔진 성능을 끌어올렸고, 리어타이어의 폭을 넓히는 등 변화를 가져왔다.

2007년에는 스포스터 탄생 50주년을 기념하는 리미티드 버전과 함께 XL1200N 나이트스터(XL1200N Nightster) 모델을 추가했다. 낮은 시트, 포크 부츠, 무광의 투톤 컬러 등을 적용해 보다 과감하고 젊은 감각의 스타일로 완성해 주목을 받았다. 2008년에는 XR1200을 공개했는데, 본격적인 네이키드 타입이었으며, 도립식 포크 및 더블 디스크 등을 탑재했다. XR1200 XR750을 오마주하듯 퍼포먼스에 집중했다. 후기형 XR1200X는 스타일과 운동성능을 보다 고급화했고, 유럽시장을 공략했던 만큼 스포츠 주행에 가장 최적화된 스포스터였다.

그리고 2009,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아이언883(Iron 883)이 등장했다. 아이언883은 스포스터 본연의 경쾌한 주행감각과 간소한 구성, 세련된 디자인을 바탕으로 보다 많은 현대인들에게 스포스터의 매력을 알렸다. 그리고 할리데이비슨은 나이트스터와 아이언883을 주축으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뉴스쿨 문화를 전파했다. 번쩍이는 크롬을 덜어내고, 블랙을 주 컬러로 적용해 반항적인 이미지와 커스텀 라이프를 제시했다. 바로 다크커스텀이다.

다크커스텀은 스포스터 계열을 비롯해, 스트리트 및 소프테일의 몇몇 기종을 포함한 일종의 커스텀 라인업이다. 따라서 브랜드가 구현한 스타일의 구애를 받지 않도록 최소한의 틀만 남겨 커스텀의 여지를 충분히 제공했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커스텀으로 모터사이클을 완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통해 기성세대와 다른 자신만의 모터사이클 라이프를 만들어가라는 의미이다. 2010년에 등장한 포티에잇도 역시 다크커스텀 라인으로 두툼한 타이어와 낮은 차체의 실루엣을 갖췄으며, 아이언883과 함께 스포스터 라인업의 간판 스타로 활약 중이다.

그리고 2016년에 등장한 로드스터는 XR1200X 이후로 스포스터 패밀리에서 가장 스포티한 포지션을 담당한다. 로드스터는 네이키드를 지향하며, 도립식 포크와 낮은 핸들바, 더블 디스크 등 경쾌한 스포츠 주행에 적합한 세팅을 갖췄다. 로드스터 역시 다크커스텀 라인으로 카페레이서 혹은 스크램블러 스타일로 커스텀을 하기에도 최적의 조건이다. 또한 유럽을 중심으로 매년 진행하는 커스텀 대회인 배틀 오브 킹스는 스포스터와 다크커스텀이 얼마나 다채롭게 변신할 수 있는지를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포스터는 지금,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