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 장르에서 낮고 긴 차체를 베이스로 대배기량의 V트윈 엔진을 탑재한 기종을 ‘아메리칸 크루저 혹은 크루저’라고 일컫는다. 아메리칸 크루저라는 장르명에서도 알 수 있듯, 한 때 크루저 장르는 미국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크루저를 대표하는 두 브랜드, 할리데이비슨과 인디언의 국적 역시 미국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보면 크루저 장르의 정통성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들은 오랜 기간 라이더로부터 선택을 받아 왔고, 그렇게 전세는 ‘아메리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동안 일본과 유럽 브랜드는 고착화된 시장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Made In America’라는 철옹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본토 공략은 현재 진행형으로 보인다. 마치 동맹이라도 맺은 듯 유럽 메이저 모터사이클 브랜드들이 비슷한 시기에 크루저 모터사이클을 출시한 것. 국적도 다양하다. 영국의 트라이엄프, 독일의 BMW 모토라드, 이탈리아의 두카티가 그 주인공으로 각각 ‘로켓3, R18, 디아벨’을 선봉장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전통적인 V트윈 엔진의 크루저와는 달리 각각 직렬 3기통, 수평 대향 2기통, L트윈 엔진을 탑재하고 크루저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트라이엄프 로켓3, 2500cc 3기통 엔진의 위엄
트라이엄프는 로켓3를 투입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2,500cc 배기량의 거대한 엔진이다. 자동차의 배기량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의 수치며 모터사이클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수치다. 로켓3는 2,458cc 배기량의 직렬 3기통 수랭식 엔진을 탑재했다. 대배기량 모터사이클의 대명사격인 할리데이비슨이 양산하고 있는 기종 중 가장 배기량이 큰 모델은 CVO 리미티드와 CVO 스트리트 글라이드로 1,923cc 배기량의 엔진을 탑재했다. 물론 적다고 할 수 없는 수치지만 2리터를 넘지는 못했다.
로켓3는 양산 모터사이클 중 가장 큰 배기량의 엔진을 탑재한 기종인 만큼 강력한 성능을 발휘한다. 크루저는 최고 출력(마력)보다는 강력한 토크를 미덕으로 여겨왔다. 최고 속도에 집착하기 보다는 대배기량을 토대로 한 넉넉한 토크와 중저속 영역에서의 펀치력을 중시한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로켓3는 최고의 크루저가 될 요건을 갖췄다. 로켓의 최대 토크는 22.3kg*m. 국산 중형차의 최대 토크는 20kg*m로 로켓3보다 낮다. 공차중량은 293kg으로 22.3kg*m의 압도적인 토크를 가벼운 차체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와의 직접적인 비교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수치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임은 확실하다.
로켓3는 강력한 엔진 외에도 다양한 매력이 있다. 우선 두 가지 기종으로 출시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로켓3 R은 공격적인 포지션의 퍼포먼스 크루저의 모습을 보여주며 로켓3 GT는 편안한 크루징이 가능해 크루저 본연의 장점에 충실했다. 두 기종 모두 쇼와 서스펜션과 브렘보 브레이크 캘리퍼를 적용해 차체 구성에 빈틈이 없다. 육중한 차체를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게 IMU(관성측정장치)기반의 코너링 ABS를 탑재했고 힐 홀드 콘트롤로 오르막 길에서도 모터사이클이 뒤로 밀리지 않는다. 라이딩 모드는 로드, 레인, 스포츠, 사용자 설정 모드를 제공해 상황에 맞는 주행이 가능하다. 계기반은 풀컬러 TFT 디스플레이를 채택, 시인성이 뛰어나고 스마트폰과의 연동으로 통화, 네이게이션, 멀티미디어 재생 등의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배기량 대비 다루기 쉽고 핸들링도 가벼운 특성을 갖고 있다.
국내에는 트라이엄프 코리아를 통해 6월에 정식으로 출시했으며, 오는 20일에는 서울 강동구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27일에는 수원 직영점에서 시승회도 진행할 예정이다. 로켓 3R은 코로시 레드와 팬텀 블랙의 두 가지 색상을 출시했고, 가격은 3,370만 원이다. 로켓 3GT는 실버 아이스 & 스톰 그레이와 팬텀 블랙 두 색상이며, 가격은 3,540만 원이다.
BMW 모토라드 R18, 빅 박서 크루즈의 귀환
로켓3의 엔진도 놀랍지만 BMW R18의 엔진도 그에 못지 않은 특별함을 갖고 있다. 1923년에 처음으로 개발된 이후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지되고 있는 엔진. 그 동안 수 많은 개량으로 완성도를 극한까지 끌어 올린 엔진. BMW 모토라드의 상징과도 같은 수평 대향 이른 바 ‘박서’엔진을 탑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R18은 BMW 역사상 가장 큰 배기량의 박서 엔진인 1,802cc배기량의 ‘빅 박서’ 엔진을 얹었다.
BMW는 자사의 헤리티지를 R18에 녹였다. BMW 크루저의 역사는 짧지 않다. 일찍이 1936년에 크루저의 형태를 갖춘 R5를 생산한 이력이 있는데, R18은 R5를 오마주해 클래식한 디자인에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 연료 탱크의 페인팅, 머플러의 실루엣, 투박하지만 박력 있는 엔진 케이스 형상, 리지드 프레임 룩, 와이어 스포크 휠 등은 R5의 유산이다. R18은 이에 더해 코너링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LED 헤드라이트, 스마트 키, 락 & 롤 라이딩 모드, ASC(Automatic Stability Control), 드래그 토크 콘트롤, 힐 스타트 콘트롤 등의 최신식 기술을 입혔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헤리티지 크루저’가 탄생한 것이다.
1,802cc 엔진은 4,750rpm에서 92마력의 최고 출력과 2,000~4,000rpm 영역에서 16.1kg*m의 최대 토크를 발휘한다. 엔진 냉각 방식은 공유랭식이며 기어는 6단으로 설정했다. 프론트에는 300mm 더블 디스크와 19인치 휠을, 리어에는 300mm싱글 디스크와 16인치 휠을 적용했고, 690mm의 낮은 시트고를 보인다. 16리터 크기의 넉넉한 연료 탱크는 크루징에 적합하다.
BMW는 올해의 키워드를 ‘헤리티지’로 설정하고 브랜드 이미지 재고를 위해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1997년 이후 20년 넘게 사용하던 엠블럼을 고전적인 디자인으로 교체했다. BMW 코리아는 경기도 남부권 딜러인 호켄하임 모토라드를 헤리티지 공간으로 꾸미며 본사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모양새다. BMW는 알나인티 시리즈를 시장에 안착시키며 레트로 열풍에 불을 지핀 성공 사례가 있다. 과연 이번에도 BMW가 R18을 궤도권에 올리며 미국산 브랜드 위주의 크루저 시장을 재편할 수 있을지 기대 된다. R18은 올해 9월 출시할 예정이다.
두카티 디아벨, 표독스런 이탈리안 퍼포먼스 크루저
앞서 소개한 두 기종에 비해 등장한 시기는 한 해가 지났지만, 상품성과 매력만큼은 뒤쳐질 부분이 없는 그래서 빼놓을 수 없는 퍼포먼스 크루저, 바로 두카티 디아벨이다. 두카티 디아벨은 2010년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뒤, 2015년 까지 1세대 모델을 판매했고 이후 풀체인지를 거쳐 2세대 모델로 이어져 오고 있다. 국내에는 두카티 코리아를 통해 2019년부터 2세대 모델이 출시 중에 있다.
두카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동적이고 스포티한 성능이다. 이런 브랜드 특성은 크루저 장르인 디아벨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디아벨은 L트윈 테스타스트레타 DVT 1262 엔진을 탑재했다. 놀라운 부분은 최고 출력이다. 디아벨은 크루저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159마력의 최고 출력을 발휘한다. 리터급 스포츠 네이키드 세그먼트에서도 쉽게 찾기 힘든 수치다. 최대 토크도 13.1kg*m로 우수하며 가변 밸브 시스템(DVT)의 탑재로 대부분의 회전 영역에서 고른 출력을 발휘하고 스로틀 반응성도 향상시켰다.
디아벨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부분은 역시 디자인이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디자인 어워드로 평가 받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2016년과 2019년 두 차례나 최우수상을 수상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차체를 이루고 있는 라인은 직선과 곡선이 적절히 배합돼 있어 날렵하면서도 터프한 풍모를 보인다. 비스듬하게 날을 세운 헤드라이트와 리어 시트는 대칭 구조를 이뤘고, 리어 240mm 광폭 타이어를 장착해 당당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강력한 힘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코너링 ABS, 윌리 콘트롤, 파워 런치 콘트롤 등을 장착했고 편안한 라이딩을 지원하기 위해 크루즈 콘트롤도 탑재했다. 디아벨은 1260과 고출력 사양인 1260S로 각각 출시했고 가격은 각각 3,050만원과 3,600만원이다. 1260S는 올린즈 서스펜션, 브렘보 M50 모노블록 브레이크 캘리퍼, 양방향 퀵 시프트 등을 장착해 화려한 차체 구성을 자랑한다.
2020년은 로켓3, R18의 등장으로 크루저 시장이 어느 때보다 활발한 모습이다. 혼다도 캐쥬얼 크루저를 표방한 레블500을 출시하며 문턱을 낮췄다. 그 동안 독점체제를 유지했던 미국 브랜드는 아직 건재한 모습이지만 고착된 브랜드 이미지 덕에 기피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경쟁 기종들에게 기회가 있는 셈이다. 트라이엄프, BMW, 두카티. 세 브랜드는 할리데이비슨이나 인디언만큼 다양한 크루저 라인업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각 기종의 성능과 매력은 분명해 보인다. 굳건한 산맥이 단번에 무너질 리는 없겠지만 크루저 시장의 지각이 꿈틀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글
김남구 기자 southjade@biker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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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커즈랩(www.bikerslab.com)